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란-이라크 전쟁 (문단 편집) === 끝없는 [[소모전]](1983년~1988년) === 그러나 팔라비 왕조의 우월한 서방제 무기들도 잦은 전투로 파괴되고 관리가 힘들어져 갈수록 망가지기 시작했다. 1981년 나스르 작전에서 서방제 [[치프틴]] 전차의 업그레이드형이었던 [[샤]] 전차가 이라크군의 소련제 [[T-62]]와 각각 250대씩 펼친 대규모 기갑전에서 무참하게 참패하거나, [[F-14]] 톰캣 10대가 [[MiG-21]]과 [[미라주 시리즈|미라주]]에 의해 손실되는 피해를 입었다. 그 밖에도 이 전쟁에선 이란의 [[AH-1|AH-1J]]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의 MiG-21 한 대를 격추시켰다거나, 이라크의 [[Mi-24]] 하인드 헬기가 이란의 F-4E 팬텀을 격추시켰다거나 하는 [[액션 영화]]나 [[비행 시뮬레이션]] 게임에나 나올법한 괴이한 기록들이 많다. 심지어 이란군 [[F-14]]가 [[AIM-54]] 한 발로 이라크군 [[MiG-23]] 3대를 격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. 물론 양국의 주장은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걸러들어야 한다. [youtube(3bqxb7fa6Uk)] [[참호]]에서 이라크군과 교전하는 이란군의 영상.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인해[* 사실 전쟁이 이 지경까지 끌면 [[미국]]조차도 대규모 작전을 이어가지 못한다. 도합 20여년이 소요된 [[미국-아프가니스탄 전쟁]]과 [[이라크 전쟁]] 당시 미국이 들인 돈이 천문학적인 수준을 넘어 거의 경제를 망가뜨리기 직전까지 갔는데도 정작 대규모 작전은 몇달도 가지 않았다.] 항공 및 해상 전력까지 장기간 동원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공군과 해군은 꼭 필요할 때만 출격하게 되었다. 게다가 양측 모두 산유국임에도 전차조차 함부로 놀리지 못해서 지상전도 보병 위주로만 굴리면서 전쟁은 전차와 비행기를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소총만 [[게베어 1898|Gew98]]에서 [[AKM]][* 다만 이란군은 이때 [[H&K G3]]와 [[MG3]]가 제식 무기였다.]으로 바뀐 [[제1차 세계 대전]]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으며, 이 때문에 [[참호전]]과 재래식 [[인해전술]]까지 동원되었다.[* 이란은 고아나 정치범과 그 식구들까지 지뢰 제거에 투입했고, 이라크도 쿠르드족 포로들이나 정치범을 똑같이 써먹었다.] 본래대로라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이란이 이라크를 제압해야 정상이지만, 호메이니 정권을 싫어하는 미국과 아랍권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했기에[* 물론 미국은 혁명과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이란을 증오하고 있었다. 그러나 [[이란-콘트라 사건]]이나 동맹국과 이란의 무역을 막지 않은 것을 보면 이라크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또 아니다. 2010년대의 중동 전쟁판을 보아도 종교와 정치와 민족주의가 다 버무려져 있지만 직접 피흘리고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쪽을 편들고 지원하는 이들은 그렇게 '필사적'이지는 않고 각자 주판알을 굴리는 모양새다.] 이라크는 이란의 공세에도 쉽사리 꺾이지 않았고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교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. 골때리는 건 [[소련]]마저 [[소련-아프가니스탄 전쟁]] 때문에 은근슬쩍 이라크를 편들던 상황이라 이란은 정말 사방팔방이 적으로 깔린 상황이었다. 어쨌든 조금씩 밀리던 이라크는 점령지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강을 건너 이라크 본토까지 쳐들어온 이란에게 누르 알 딘 알리 및 아니스 알 쟈리스 섬과도 같은 자국 영토까지 뺏기는 수모를 겪었으며 기세등등해진 이란은 '''후세인 정권 축출'''을 외치며 이라크의 [[석유]] 파이프 라인과 [[항구]]를 봉쇄했다. 다급해진 이라크는 이란군에게 [[독가스]]를 사용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[[스커드]] 미사일로 이란군과 이란의 [[민간인]] 지역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. 이에 이란도 그 보복으로 [[중국]]과 [[북한]]제 스커드를 수입해 쏴대기 시작했다. 이 와중에 북한은 이란과 비밀리에 군사 관계를 맺고 이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라크군이 날린 미사일의 잔해를 받을 수 있었다. 그리하여 소련에 그토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스커드 C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. 전쟁은 점차 피에 피를 부르는 보복전으로 확대되었다. 처음에는 상대방의 유전들이 우선 공격 목표가 되었다가 출항하는 [[유조선]]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고 1984년에 들어서는 주변국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까지 공격받았다. 나중에는 [[기뢰]]까지 닥치는대로 뿌려대는 통에 [[페르시아 만]]은 물 반 기뢰 반이 되어갔다. 이에 미 해군 함대가 해로 수호를 명목으로 페르시아 만에 고정 배치되었고 결국 [[이란항공 655편 격추 사건]]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. 한편 이라크가 이란 내 반이슬람 정권 인사들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으로 팔라비 왕조 출신 이란 파일럿들 항공기 8대와 함께 투항하기도 했다. 그러자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라크 내 [[쿠르드족]]의 독립을 지지하며 이라크에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.[* [[이중잣대|물론 이란의 쿠르드족은 독립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다.]]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2017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IS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어갈 때 이라크에서 쿠르드족이 자치 정부의 주도 아래 주민 투표를 실시하고 분리 독립을 시도하자 이란, 튀르키예, 시리아, 사우디아라비아, 이집트, 모로코 등 중동 국가들 대부분이 중동 지역 내 안정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반대하며 이라크 내 쿠르드 지역을 봉쇄하고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이 독립을 철회하지 않자 이라크는 2017년 10월 키르쿠크 등 쿠르드 자치구 일부를 공격하여 독립 시도를 무력으로 저지했다.] 격분한 후세인은 [[1987년]] 사촌이자 측근인 [[알리 하산 알 마지드]], 일명 케미컬 알리를 시켜 화학무기로 수천 명의 쿠르드족 민간인을 학살하고 50만 명을 강제로 수용소에 수감시켜 진압했다.[* 영국 드라마 [[하우스 오브 사담]]에서 종전 이후에 이 사건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[[타리크 아지즈]]가 "국제연합에서 우리가 쿠르드족을 학살한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."고 넌지시 경고하자 알리 하산 알 마지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"전쟁 중에 뭘 바란 거요? 우리가 놈들에게 꽃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나?"라며 코웃음을 친다. 그리고 --꽃을 안 보내준 대가로-- 20여년 뒤 교수대로 끌려갔다. 사담 후세인과 케미컬 알리는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, 아지즈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70세가 넘어 아랍 풍습에 따라 무기수로 살다가 2015년에 '그나마' 평안하게 옥사했다. 게다가 알리는 한 술 더 떠서 교수형 과정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'''[[참수|목이 잘려나가버렸다.]]'''] 그러던 중 이라크군은 [[브라질]] 등 여러 나라에서 잡다한 EE9, [[PT-76]][* 심지어 2차 대전에서 쓰이다 몇몇 국가에 [[치장물자]]로 남아있었던 유물급 [[M36 잭슨]], [[M36B1]], [[T-34-85]], [[M4 셔먼]], [[처칠 전차]] 이탈리아제 소형 전차 [[L3]] 탱캣 등까지 관리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, --어떻게 점점 더 옛날 무기가 튀어 나오나-- 2005년 10월 31일 이라크 전쟁 중 티크리트 인근에서 미군에게 버려진 이들 구형 전차가 발견되었다. 이 장비들은 대부분 신용거래로 사온 것인데 이로 인해 이라크 경제는 더욱 피폐해져 이후 [[걸프 전쟁|쿠웨이트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.]]] 등의 기갑 장비들을 수입해 초유의 반격을 성공시키며 여러 영토를 탈환하고 다시 이란의 주요 요충지 점령에 성공했다.[* 이 때 활약한 군이 후에 [[공화국 수비대]]가 되어 후세인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.] 주고받는 장기전 앞에 이라크나 이란이나 이득 본 것은 하나도 없고 국력만 피폐해졌다. 게다가 천문학적인 전비를 감당 못해 이라크 측 스폰서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마저 발을 뺐고, 이라크는 보복으로 사우디와 단교했다. 그러나 이란 또한 이미 피폐해진 상태여서 이라크에 결정타를 날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 영토 일부 점령 이상으로 뭔가를 하지 못했다. [[1988년]] 2월부터 이라크군은 "도시 전쟁 작전"으로 반격에 나섰다. 아직 남은 경제력과 탄약, 무기 등을 전부 쥐어짜 이란에게 한방 먹이는 전략으로, 실패하면 그걸로 끝나는 상황이었다. 그래서 말 그대로 막나갔는데 스커드B 미사일 폭격을 2개월 동안 150회 감행해 [[테헤란]]을 쑥밭으로 만들고[* 이 공격을 기점으로 이란 호전파들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다. 이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정전에 반대했으나 테헤란이 미사일 공격의 대상이 됨으로써 호전 여론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. 당시 이란 노인층의 호전 여론은 [[도쿄 대공습]]과 함께 '[[허버트 후버|전쟁은 늙은이들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 죽는 건 젊은이다]]'라는 속설의 실제 사례로 꼽힌다.] 1988년 5월 이란에 다시 쳐들어가는 등 마지막 발악으로 이란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. 결국 이란은 알알파우 반도와 마즈눈 군도를 제외한 나머지 점령지를 상실했다.[* 이란이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 당시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.]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공세는 알알파우 반도 및 마즈눈 군도에서 이루어졌는데, 여기서 이라크군이 승리를 거둔다. 물론 이라크가 경제적으로 이미 망한 상황이라 부족한 면이 적지 않았으나[* 후일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쉽게 무너진 배경은 무기 자체도 뒤떨어졌으나 이렇게 경제적으로 이미 망한 상황이라 미국과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전무했던 점도 있다.] 이란군 또한 이미 경제적으로 받쳐줄 수 없어 이라크군의 공세를 쉽게 막아내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었고, 그래도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. 결국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여력이 남지 않은 양국이 전쟁 전으로 돌아가는 종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